한글날 제정
일본의 감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리말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기 위해 한글날(가갸날) 제정

일본의 감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리말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기 위해 한글날(가갸날)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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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때부터 지금까지의 한글에 대한 평가는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한글은 과학적 원리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말소리를 정밀하게 표기할 수 있으면서도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다.
한글의 제자원리와 사용법을 해설한 책인『훈민정음』의 서문에 나온 “28자로 전환이 무궁하며 간단하지만 요긴하고 정밀하지만 소통이 쉽다. 그러므로 똑똑한 자는 반나절이면 깨우칠 수 있고 우둔한 자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라는 말은 가장 과학적이면서 가장 실용적인 한글의 특성을 정확히 짚고 있다.
조선말 큰사전 원고(보물 제2086호)ⓒ독립기념관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한글을 찬양하는 사람의 평가와 한글을 반대했던 이들의 평가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언문을 시행하오면 관리된 자가 오로지 언문만을 습득하고 학문하는 문자를 돌보지 않아서 관리들이 둘로 나뉠 것”이라는 최만리의 우려는 역설적으로 쉽고 편리한 한글의 장점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자였기에 근대의 문을 여는 시점에 한글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문 글쓰기를 폐지하는 개혁 과정에서 한글의 우수성은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한글을 국문으로 삼는 것에 반대하는 논리에 반박하며, “국문이란 것은 조선 글이요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것이라, 한문보다 백배가 낫고 편리한즉 내 나라에 좋은 게 있으면 그것을 쓰는 것이 옳다”는 내용의 『독립신문』(1896.6.4.)의 사설은 한글의 우수성을 확인하는 것이 곧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고 그 우월성을 확인하는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한글을 국문으로 삼는 것이 근대 개혁의 상징적 조치가 되면서, 한글은 근대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구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글처럼 우수한 문자를 만든 민족으로서의 자부심으로 한글과 우리말을 부흥시키고, 이를 통해 민족과 국가의 번영을 이끌겠다는 논리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시경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은 한글 창제일 기념식을 계획했다. 그 당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글 창제 기념가」에는 한글에 대한 자부심을 고리로 국민정신을 고양하고자 했던 선각자들의 열망이 담겨 있다.
2절: 거룩하고 밝은 우리 선왕조 세종 / 말에 맞은 글을 새로 지어내시니 / 아름답고 아름답다 우리나라 글 / 특성을 그렸도다
4절: 뇌수 중에 조국정신 배양하기는 / 국문 숭용(崇用)함이 제일 필요하도다 / 경편(輕便)하고 간이(簡易)하다 우리 국문은 / 세계에 으뜸일세
5절: 기쁘도다 기쁘도다 오늘날이어 / 국문 창제 기념식 거행해 보세 / 바라노라 어서 속히 연구하야서 / 영원히 빛내 뵈세
「우리글 창제 기념가」의 가사는 한글 창제 기념식을 거행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첫째는 세종이 만든 글자이자 우리말에 맞는 아름다운 글자인 한글은 쉽고 편리한 점에서 세계 으뜸이라는 것, 둘째는 한글을 받들어 쓰는 것이 조국정신, 즉 국민정신을 배양하는 데 가장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글 창제 기념가」는 주시경의 제자인 이규영이 필사한 비망록인 ‘온갖것’(1912)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기념가를 만든 사람이 누구이고, 언제 만들었는지, 그리고 기념식을 거행했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내용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가사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기념가는 대한제국 시기에 작성된 것 같고, 가사에 우리 말과 글의 기원과 의의에 대한 주시경의 주장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노래의 작사는 주시경이 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나라의 존립이 위태로워지면서 우리말과 글의 존립도 보장할 수 없던 시기에 주시경은 한글의 창제 및 사용의 의미와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한 「우리글 창제 기념가」를 썼다. 주시경은 한글과 우리말의 운명을 국가의 운명과 연결 지으면서, 사람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지키는 것이 곧 나라를 지키고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길임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서 일제강점기 일본의 국어상용화정책에 대응하여 우리 말과 글을 지켜낸 힘의 출처를 확인할 수 있다.
1924년 1월 6일자 『조선일보』의 사설, 「조선 문화의 대기념」에서는 한글 창제의 역사를 밝히면서 한글 창제일을 기념하자고 제안한다. 『조선일보』는 왜 이날 사설에서 한글 창제일을 기념하자고 했을까?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라는 『세종실록』(1443.12.30.)의 기록에 근거하면 이때가 한글을 창제한 지 8회갑(480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실록의 날짜가 음력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1443년 12월 1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1월 6일을 한글 창제 기념일로 제안한 것이다.
사설에서는 한글이 세계적 문화를 흡수함과 간편 영리함에서 다른 나라의 글자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함을 강조하면서, 한글을 “만세불후의 대공업”으로 찬양하였다. “매년 이날로 우리 문화의 대기념일이라 하는 것”이라는 제안은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찬양과 연결된다. 한글 창제 기념일은 탁월한 한글을 찬양하며 민족적 자부심을 고양하는 날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한글 창제 기념일을 정하려는 움직임은 대중적인 언어 문화운동의 시작을 예고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주시경의 제자들이 결성한 조선어연구회는 1924년 2월 1일에 한글 창제 기념식을 치렀다. 조선어 연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끼리 모인 소박한 기념식이었지만, 합법적으로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언론도 관심을 보였다. 『동아일보』(1924.2.1.)는 조선어연구회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기념식을 연다는 소식을 전하며, “그 기념식을 음력 12월 27일로 정하여 행하게 된 것은 처음으로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조하시기는 즉위 25년에 마쳤으나 반포하시기는 동 27년이었으므로, 27년이라는 27의 의미를 취하여 27일에 행하기로 한 것이라더라”라고 기념일을 2월 1일에 연 이유를 밝혔다. 2월 1일은 음력 12월 27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이었던 것이다. 『세종실록』에는 ‘이달’, 즉 12월에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만 기록되었기에 그 일자를 임의로 12월의 첫날로 정하거나 12월의 27일로 정했던 것이다.
조선어연구회 초대 간사였던 휘문고보 조선어 교사 이병기는 그의 일기에서 1924년 한글 창제 기념일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24년 2월 1일(금) 맑다. 오후 4시부터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훈민정음 8회갑 기념회를 하였다. 모인 이가 수십 명, 그중에 다수는 조선어연구회원이고, 나머지는 동지자들이다. 동 교장 임경재 씨의 사회로 개회사를 마치고 신명균 군의 세종대왕의 공적에 대한 강화가 있었고, 그다음에는 장지영 군의 주시경 선생에 대한 강화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권덕규 군의 정음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고, 그만 폐회하였다. 때는 오후 7시. 다시 교장실로 모여서 과자에 차를 먹었다. 그러고는 권 군하고 오다가 어느 음식점에 들러 요기를 하였다.
1924년 1월 6일을 한글 창제 기념일로 하자는 제안이 있은 후, 조선어연구회는 2월 1일을 한글 창제 기념일로 정하여 첫 기념식을 열었다. 그런데 한글 기념일이 대중적으로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26년 11월 4일 훈민정음 반포 8회갑식을 치르면서부터다. 창제 8회갑 기념일을 치른 조선어연구회는 2년 후인 1926년에 반포 8회갑 기념식을 준비하면서 한글에 대한 관심을 환기할 계획을 세웠다.
1926년 11월 4일을 반포 기념일로 정한 것은 “이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라는 『세종실록』(1446.9.29.)의 기록에 근거하였다. 음력 9월 29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인 11월 4일을 한글 반포 기념일로 정한 것이다.
1924년의 한글 창제 기념식이 조선어연구회의 소규모 행사였던 것과 달리, 1926년 11월 4일의 한글 반포 기념식은 조선어연구회와 신민사가 공동으로 주최했고, 학계, 언론계 등의 저명인사들이 참여하면서 행사 규모가 1924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아래의 1926년 11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나타나듯이, 각계의 저명인사들이 모이면서 한글 반포 기념일과 관련한 논의도 이뤄졌다.
권덕규 씨의 금후로 기념할 날을 ‘가갸날’로 함이라든지 우리가 속칭 언문이라 종래 불러온 것을 크고 무한하다는 ‘한’이라는 것을 취택하야 ‘한글’이라 함은 어떠하냐는 의견 설명이 있었고, … 어윤적 씨의 그에는 찬성치 않고 세종 때부터 불러온 정음날이라 함도 무방하다는 등 여러가지 문답이 있는 외에…
가갸날 기념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6년 11월 6일자 기사ⓒ국사편찬위원회
한글 반포 기념식 이후 열린 좌담회에서는 한글 반포 기념일 명칭으로 ‘가갸날’과 ‘정음날’ 중 무엇을 채택할지, ‘언문’을 대신할 이름으로 ‘한글’과 ‘정음’ 중 무엇을 채택할지, 그리고 이 기념일을 기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어졌다. 후속 논의를 위해 각계의 대표 인사들이 별도의 실행 위원회인 ‘정음반포기념회’를 구성했는데, 11월 10일에 열린 논의에서는 ‘언문’을 대신할 이름은 ‘우리글’로, 한글 반포 기념일의 이름은 ‘정음날’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조선어연구회에서는 이 결정과 관계없이‘가갸날’과 ‘한글’을 계속 썼고, 1928년부터는 글자 이름 ‘한글’에 맞춰 그 반포 기념일을 ‘가갸날’에서 ‘한글날’로 바꿨다. 그런데 조선어연구회의 적극적인 활동에 힘입어, ‘우리글’과 ‘정음날’보다 ‘한글’과 ‘한글날’이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게 되었다.
명칭을 둘러싼 논쟁은 이후 조선어 연구 및 표기법 제정 등에서의 논쟁으로 이어졌지만, 한글과 관련한 문제가 논쟁거리가 된 것 자체가 한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면이 있다. “이번 훈민정음 반포 팔회갑을 기회로 하여 조선어문에 대한 애정이 민간에 진작된 것은 가하(嘉賀)할 일이다”란 평가에서 볼 수 있듯이, 1926년 11월 4일의 한글 반포 기념식은 일제강점기 우리말 운동이 대중화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11월 4일 이후 열린 한글 강연회에는 수많은 청중이 몰렸고, 이러한 분위기는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리원에서 11월 8일에 열린 기념강연회의 소식을 「의미심장한 가갸날 축하회」란 제목으로 보도한 기사는 “여러 가지 의견과 감상담의 교환으로 일반은 신생명의 역동을 맛보는 깊은 인상을 얻어가지고 동 11시에 산회하였다”로 끝을 맺는다. 한글에 대해 의견을 주고 받는 것만으로도 “신생명의 역동”을 맛보았다는 참석자들의 소감은 한글 반포 기념 행사가 민족적 자의식을 일깨우는 장이 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한글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글 반포 기념일을 국수적 관념을 주입하는 장으로 활용하는 데 대한 반발도 나타났다. 그러나 그러한 반발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무엇보다 민족적 자부심이 필요한 상황에서,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에 대한 찬양과 한글이 민족정신의 상징이자 민족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호소가 대중적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 1독회 종료 후 현충사를 참배한 조선어학회 위원들(1935.1.6.)ⓒ한글학회
한글에 대한 자부심을 민족에 대한 자부심으로 승화하려 했던 이들은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원인을‘표기법을 통일하지 못하고 우리말 사전 하나 편찬하지 못한 현실’에서 찾았다. 그러니 한글에 대한 자부심을 키울수록 통일된 표기법과 우리말 사전이 없는 현실에 대한 자괴감은 더 깊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문명화된 문자를 가진 자부심과 통일된 표기법과 모어 사전이 없는 자괴감의 괴리에서 오는 고통은 결국 민족어 운동에 나서는 동기이자 이유가 되었다. 일제의 방해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의 결성과 조선어사전의 편찬, 1933년 『한글마춤법통일안』의 발표, 1936년 『조선어표준말모음』의 발표 등을 줄기차게 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최현배 등 5인 판결문(고등법원, 1945.8.13.)ⓒ국가기록원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일제는 표준어사정안 발표회를 마지막으로 조선어학회가 주최하는 모든 집회를 금지하였다. 이에 따라 1937년부터 한글날 기념식은 열리지 못했다. 중일전쟁과 함께 시작된 전시체제기에 일본은 식민지 내에서 어떠한 민족주의 운동도 허용하지 않았고, 조선어학회의 이윤재, 최현배 등이 민족운동을 이유로 옥고를 치렀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와해되기 전까지, 조선어학회는 조선어사전편찬사업을 지속했다. 일본의 국어상용화정책으로 우리 말과 글의 존립을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사전 편찬을 지속했던 힘의 원천은 우리 말과 글을 지켜 민족을 지켜야 한다는 소명의식이었다. 1937년부터 한글날 기념식은 금지되었지만, 해마다 한글날이 오면 그들은 한글을 통해 맛보았던 “신생명의 역동”을 떠올리며 소명의식을 새롭게 다지지 않았을까?
해방 후 한글날은 10월 9일로 바뀐다. 1926년부터 11월 4일을 한글 반포 기념일로 지정한 후, 한글날은 음력과 양력의 환산법을 바꾸면서 10월 29일과 28일로 날짜를 조정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해방 후 한글날이 바뀐 것은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940년에 한글의 제자 원리와 창제 동기 등을 정리한 『훈민정음』이 발견되었다. 이 책자의 말미에 적힌 저술 완결 시점은 1446년 9월 상한인데, 이를 통해 한글 반포일의 근거가 된 『세종실록』(1446.9.29.)의 기록, 즉 “이 달에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가 『훈민정음』의 완성을 뜻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9월 29일이 아닌 9월 상한을 기준으로 한글 반포일을 정해야 했고, 1945년에 해방이 되면서 한글날을 10월 9일로 확정하였다.
해방 후 맞는 한글날은 해방의 기쁨을 나누고 해방 이후 국어 재건의 과제를 공유하고 점검하는 날이 되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사전 원고가 일본 경찰에 압수되는 바람에 마무리하지 못했던 우리말 사전의 출간, 학교 교육을 위한 한글 교과서 출간, 한글 보급을 위한 강습회 실시 등의 당면 과제를 한글날을 계기로 점검하고 구체화한 것이다. 한글날을 기념하며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확인하는 시간은 곧 우수한 우리 민족이 국가 재건의 과제를 차질없이 수행할 것을 확신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글날의 역사적 그리고 현재적 의미가 이처럼 분명했기에, 미군정청은 1946년에 군정법률 제9호 「근무규정」에 의하여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1946년 10월 9일에 열린 한글 반포 500돌 기념식에는 미군정청의 하지 사령관과 러취 장관이 참석하여 축사를 했고, 시민 2만여 명이 거리 행진을 했다. 이처럼 해방 공간에서 고양된 분위기는 정부 수립 후에도 이어졌는데,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당시, 조선어학회에서는 정치적으로 해방인 ‘광복’을 기념하는 것과 문화적 해방인 ‘한글 반포’를 기념하는 것을 같은 차원으로 보자는 논리로 한글날을 국경절로 지정하자고 주장했고, 그 이후도 이러한 주장을 계속하였다.
최현배는 한글날을 국경일로 지정해야 하는 이유로, “훈민정음은 정히 우리 배달 겨레의 문화 독립 선언이요 한글은 문화 독립의 기초”이며, “한글의 탄생은 다만 한 종류의 글자의 생겨남이 아니라 실로 그것은 겨레 의식 통일의 상징이요 겨레 문화의 영원한 발달의 원동력”이라 했다. 한글의 운명을 민족의 운명과 연결 지으면서, 한글에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한글 마춤법 통일안(조선어학회, 1933)ⓒ국립한글박물관
한글날은 2005년에 이르러 국경일로 격상되었고, 2013년에 공휴일로 부활하였다. 21세기에 한글날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민족적 자부심의 고양일까? 문화적 독립선언이나 민족의식의 통일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 경제, 문화적인 좌절로부터 벗어나고자 민족적 자부심과 문화적 독립 또는 민족의식의 통일을 애써 내세워야 했던 때와 한국 사회가 모든 면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한 21세기의 상황은 달라졌다. 이제 우리가 이룬 정치, 경제, 문화적인 성과 위에서 한글의 의미를 생각할 때인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적 자부심에서 세계시민으로서의 자부심으로, 문화적 독립에서 문화적 베풂으로, 민족의식의 통일에서 민주의식의 다양성으로 그 의미를 확장해 나아가야 한다. 분명한 것은 오늘 한글날의 의미는 오늘 한글을 쓰면서 사는 우리가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