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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총파업 당시 인천부두(좌)와 원산노동연합회(우)의 모습 (동아일보 1929.1.29.)ⓒ국사편찬위원회
일제 치하 한국인 노동자들은 식민지의 구성원이자 임금노동자로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혹사당했다. 즉, 노동자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적 억압과 수탈, 민족 차별이라는 이중, 삼중의 굴레에 놓여 있는 존재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일제에 대한 저항과 투쟁을 통해 민족 독립과 해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다. 따라서 반일, 반제국주의적 민족 독립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일제에 의한 식민지적 착취와 수탈에 반대하였다.
김사국, 이재유, 강주룡은 이러한 처지와 조건 하에서 노동운동을 독립운동의 흐름과 결합시키며, 일제에 맞서 적극적인 투쟁에 나섰다.
이재유는 을사늑약이 있었던 1905년 8월 함경남도 삼수군 별동면 선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살 때인 1919년 3.1운동을 겪으면서 독립에 대한 깊은 자각을 하게 되었다. 이후 이재유는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일과 학업을 병행하였으나, 학자금 부족으로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였다.
일제가 작성한 이재유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1925년 말 일본 도쿄에 건너가 신문배달부로 일하면서 니혼대학 전문부에 입학했다. 1926년 여름에는 고향 함경남도 삼수군 별동면 선소리를 찾아 그곳에서 농민야학회를 설립하였다. 그 해 8월에는 삼수유학생 강연회를 열어「인생과 욕망」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이재유는 1927년 봄 도쿄제국대학 신인회가 주최하는 야학 노동학교에 다니면서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는 도쿄조선노동조합 북부지부에 들어가 1927년 3월 조직선전부장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노동조합 전국평의회 계열의 도쿄합동노동조합에 가입하는 등 노동운동에 전념하였다. 1927년 8월에는 조선총독정치비판대연설회에서 조선공산당사건 공판변호사파견 선전물을 배포하다가 검속되었다. 1927년 11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후보위원이 되었으며, 1928년 4월에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서 북부야체이카 구성원으로 활동하였다.
경성트로이카 활동
이재유는 1928년 8월 ‘제4차 조선공산당’ 관련자로 체포되었다. 그는 1930년 11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이재유는 종래의 파벌적 운동을 비판하며 ‘세 마리의 말이 마차를 끄는 것과 같이 회원 전부가 각각 자유로이 선전하고 투쟁’한다는 의미에서 ‘경성트로이카’를 조직하여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 하였다.
이재유는 영등포와 용산의 공장 등을 중심으로 노동운동 단체·농민조합 조직, 독서회를 통한 학생운동 지도 등 부문별 운동을 전개하며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독립의 기반을 조성하고자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후 1934년 1월 22일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당하여 취조를 받았으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주한 뒤 측량 인부로 위장하고 경성재건그룹을 조직하였다.
뒤이어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지금의 도봉구 창동)에서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을 조직하였다. 이 시기에 기관지『적기』를 발간하여 국내외 정세의 특징과 조선혁명의 전략과 전술 등을 제시하였고, 조선의 독립과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좌익전선의 통일’등을 제기하였다.
이재유는 1936년 12월 25일 결국 체포되어 1938년 7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등 위반으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42년 9월 12일 형기가 만료되었으나 비전향자라 하여 출옥하지 못하다가 1944년 10월 26일 청주보호교도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2006년 이재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재유가 남긴 항일노동운동의 의미
이재유는 일제 식민통치 아래 일본 경찰의 탄압이라는 엄혹한 상황에서도 비밀리에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통해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는 당대의 어느 운동가보다도 민족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편 노동운동을 조직하고 일제에 저항하는 동맹파업, 동맹휴업을 일으켰다. ‘당대 최고의 혁명가’로 불린 이재유는 1944년 10월 해방을 앞두고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다 옥사하였으나, 그의 활동은 독립운동사와 노동운동사의 빛나는 전통이 되었다.
김사국은 1895년 11월 9일 충청남도 연산(連山, 현 논산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13세 때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동생 김사민과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다. 김사국은 글을 익히면 곧바로 외울 만큼 영특했다. 그는 1907년 상경하여 보성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일본에서 고학하며 한국 유학생들의 학술단체인 대한학회, 대한흥학회에 가입하여 출판부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일제가 작성한 김사국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김사국은 1910년 경술국치 즈음 만주로 건너갔다가 귀국하여 관립 한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에 건너가서 관동도독부 육영학교에서 수학한 뒤, 개원(開原) 농장에서 농업 견습 등을 하면서 민족 독립을 모색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김사국은 1919년 3.1운동 직전 한성 정부 수립을 위한 ‘조선국민대회’를 준비했다. 그는 13도의 대표들로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다가 1919년 4월 23일 ‘국민대회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20년 9월 6일 출옥하였다.
서울청년회의 창립과 교육운동, 노동운동
출옥 후 김사국은 조선청년회연합회와 조선노동대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조선청년회연합회 기관지『아성(我聲)』에 「사회생활을 대상으로 한 신도덕의 수립」,「아인생관(我人生觀)」등을 기고하였다. 뒤이어 1921년 1월 서울청년회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1921년 7월 평생의 동지인 박원희와 결혼하고 10월에는 도쿄로 건너가서『5.1신보』발기에 참가하였다. 김사국은 도쿄 미나미센주(南千住) 교외에서 동생 김사민 등과 사회혁명당을 조직하고 11월에는 흑도회(黑濤會) 결성에 참여하였다.
김사국은 1922년 1월 무산자동지회에 참여하고, 김약수 등과 ‘동우회선언’을 발표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김사국은 1922년 4월 인쇄직공친목회 주최로 천도교회관에서「노동운동의 의의」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같은 해 9월 니가타현(新潟縣) 조선인 학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하여 천도교회관에서 진상조사 결과를 보고하였다. 김사국은 조선노동대회 주최 강연회에서 「민족적 단결과 계급적 단결」이란 주제로 강연하다가 일제 경찰의 제지로 강연을 중단당하였다. 10월에는 서울청년회 내부에 사회주의 비밀그룹을 창립하고 자유노동조합 발기총회에 참여하였다. 자유노동조합은 지게꾼, 막노동자 등이 중심이 되어 현대사회의 불합리와 노동자의 참상을 지적하고 노동자의 단결을 주장하였다.
이 무렵 김사국은 잡지『신생활사』에 게재된 ‘자유노동조합취지서’의 내용을 문제삼아 일제가 신문지법위반 등으로 동생 김사민 등을 기소한 ‘신생활사 필화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피해 아내 박원희와 간도로 피신하였다. 김사국은 1923년 3월에는 간도 룽징(龍井)에서 방한민(方漢旻) 등과 민족교육기관인 대성중학교 부설 동양학원(東洋學院)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동양학원 탄압사건’으로 다시 도피하여 닝구타(寧古塔)로 가서 대동학원(大同學院)을 설립하는 등 민족독립과 교육운동에 종사하였다.
폐병으로 귀국한 뒤, 조선노농대회 준비위원 등 활동
1924년 5월 김사국은 폐병이 걸린 몸으로 귀국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민족 독립을 외치며 무산자의 해방과 교육을 위해 불꽃처럼 투쟁해 온 김사국의 몸은 너무 지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24년 12월 창립된 사회주의자동맹의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25년 1월 전조선사회주의운동자대회의 개최를 주창하였다. 1925년 3월에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의 부당성을 제기하였다. 또 전조선노농대회 준비위원, 조선사회운동자동맹 상무위원,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책임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꾸준히 활동을 이어갔다.
김사국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다. 마침내 그는 1926년 5월 8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 북악청년회관에서 31세에 세상을 떠났다. 40여 개의 사회운동 단체에서 500∼600여 명이 참석하여 사회운동연합장으로 영결식이 치러졌다.
정부는 김사국에게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평원고무공장 파업을 보도한 조선일보 1931년 5월 31일자 기사. 강주룡이 직접 쓴 편지글이 포함되어 있다.ⓒ조선일보사
강주룡은 1901년 평안북도 강계(江界)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자랐으나 14살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서간도로 이주하였고, 20살에 퉁화현(通化縣)에서 15세의 최전빈과 결혼했다. 남편 최전빈은 채찬의 휘하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다가 병사하였다.
이후 강주룡은 노부모, 어린 동생과 함께 평양에 정착하여 생계를 위해 평원고무공장에 취직하여 직공으로 일하였다. 평양은 서울, 부산과 더불어 고무신 제조업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평양의 고무공장 공장주들은 고무공업조합과 같은 조직적 움직임을 통해, 원료 구입과 자본 조달의 어려움을 임금 인하로 해결하려 하였다. 공장주들의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고자 한 것이다. 이에 노동자들은 임금인하와 벌금제도 등을 반대하며 저항하였다.
을밀대의 체공녀(滯空女)
1931년 5월 16일 평양 선교리에 있는 평원고무공장이 임금인하를 발표하자 노동자들은 이에 저항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12일 동안 파업을 지속했지만 공장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5월 28일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은 단식투쟁에 들어가 공장을 사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 날 새벽 1시가 되자 공장주는 일본 경찰을 끌어들여 노동자들을 쫓아내고 노동자 49명 전원을 해고했다.
공장에서 쫓겨난 강주룡은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아침에 사람들이 모이면 평원고무공장주의 횡포를 호소하고 죽기로 결심했다. 궁리 끝에 그녀는 광목 끝에 돌을 매달아 지붕 위에 던진 후 이것을 타고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갔다. 5월 29일 아침이 되자 모란봉 일대를 산보하던 사람들이 을밀대 지붕 위에 앉아 있는 강주룡을 발견하고 모여들었다. 강주룡은 이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일장 연설을 하였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천3백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천 3백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해서는 …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 나는 평원고무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하략)
『동광』제23호(1931.7.5.),「을밀대 위의 체공녀, 여류투사 강주룡 회견기」
결의에 찬 연설을 들은 군중들은 감격했다. 한 예수교 장로는 그 자리에서 웅변을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동아일보』 1931.5.31.)
을밀대 지붕 위에 오른 강주룡의 모습ⓒ국사편찬위원회
강주룡을 검거하기 위해 경관 40여 명이 출동하였다. 이들은 구명 도구를 펼쳐 놓은 뒤, 소방수 3명을 을밀대 지붕 위에 올려보냈다. 결국 강주룡은 그물망으로 떨어졌고, 곧바로 평양경찰서에 검속되었다.
평양서로 끌려간 강주룡은 5월 29일 저녁부터 6월 1일 새벽 2시 검속 기간이 끝나 풀려날 때까지 한 끼도 먹지 않았다. 경찰은 유치장 안에 밥을 놓아두면 먹을 것이라 여겼으나, 강주룡은 임금인하를 취소하지 않으면 먹지 않겠다며 한 끼도 먹지 않고 버텼다. 30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도 공장문 앞에 모여 공장주의 임금인하에 항거하였다. 강주룡은 선교리 공장문 앞으로 돌아가 동료들을 격려하고 파업을 지도하였다. 이에 공장주는 강주룡 등 20여 명을 해고하고 나머지 노동자들에게 출근하지 않으면 해고된다는 통지서를 발송하였다.
31세, 꽃다운 삶을 마감하다
강주룡은 1931년 6월 9일 다시 검거되었다. 193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한 ‘적색노조’즉 혁명적 노동조합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은 ‘평양적색노조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강주룡 등 8인에게 7월 3일 예심을 청구했다.
평양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감옥에서 투쟁을 벌이던 강주룡은 극심한 신경쇠약과 소화불량으로 1년이 지난 1932년 6월 7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운 강주룡은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두 달 후인 8월 13일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31세의 꽃다운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틀 뒤, 동지 백여 명이 모여 장례를 치르고 서장대 묘지에 안장하였다. 강주룡의 삶은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서 한국인 노동자가 처한 현실과, 그를 개선하고자 했던 항일노동운동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정부는 강주룡에게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