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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우회

보훈누리
2025-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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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우회

전국적인 여성운동조직으로 항일구국운동과 여성 지위향상에 힘쓰며 한국근대여성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

1. 근우회 창립

3.1운동은 여성사에 있어 역사적 분기점이었다. 1898년 최초의 여성운동 단체인 찬양회 결성과 함께 본격화된 여권운동은 1919년에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남녀평등권과 여성 참정권을 천명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선포함으로써 보다 진전된 결실을 이뤘다. 3.1운동에서 여학생을 비롯한 여성들이 보여준 활약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의해 여권을 보장한다는 제도적 선언이 이루어지면서 여성과 여성운동을 바라보는 사회 인식 역시 달라졌다.

3.1운동 이후 신교육을 받은 신여성이 이끄는 여성운동은 사회운동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1920년대 초에는 기독교계 여성운동가와 여성 교육가가 주도하는 여성 계몽운동이 사회적 주목을 받았다. 또한, 신여성의 등장이라는 문화현상 속에 여성해방론이 등장했고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운동도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27년에 여성운동계 전반을 아우르는 전국적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가 탄생했다.

2. 근우회의 창립 배경과 과정

1) 근우회의 창립 배경

1920년대 여성운동이 제일 먼저 제기한 의제는 ‘여성 계몽’이었고 계몽의 수단은 교육이었다. 3.1운동 직후 선도적으로 여성 계몽운동을 이끌었던 여성운동단체는 조선여자교육회였다. 차미리사는 1919년 경성 종교교회에 부인 야학강습소를 설립하고 이듬해에 조선여자교육회를 창립했다. 조선여자교육회는 여러 유지의 도움으로 1921년 5월 경성 청진동에 회관을 마련했다. 하지만 운영비가 부족했다. 차미리사는 순회강연단을 조직해 전국을 돌며 강연회를 열어 기금을 모았다. 순회강연단은 7월 9일 경성을 떠나 9월 29일 남대문으로 돌아올 때까지 84일 동안 67개의 지역에서 강연했다.

이와 같은 여성 계몽운동의 주역은 ‘모던걸’이라 불린 신여성이었다. 1920년 3월 김일엽은 여성잡지 『신여자』를 창간하고 여권 신장을 주장하며 신가정의 상을 제시했다. 1923년에 천도교에서 여성잡지 『신여성』을 창간하면서 이제 신여성은 중등학교 정도를 졸업한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들 신여성은 직업과 가정을 양립하고 자유연애 결혼으로 부부 중심의 이상적 가정을 꾸리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다. 그런데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중심으로 여성해방론이 주장되면서 이와 같은 신여성상이 비판되었다. 여성 사회주의자들은 ‘신여성이란 구제도의 불합리한 환경을 부인하는 강렬한 계급의식을 가진 무산 여성으로서 새로운 환경을 창조하고자 하는 정열이 있는 새 여성’이라고 주장했다.

「여성동우회 발기회」(동아일보 1924년 5월 5일자 기사)ⓒ국사편찬위원회

「여성동우회 발기회」(동아일보 1924년 5월 5일자 기사)ⓒ국사편찬위원회

이처럼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여성운동은 기독교를 배경으로 미국 혹은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신여성과 사회주의를 배경으로 활동하는 신여성이 이끌었다. 기독교계 여성운동을 대표하는 단체는 1923년에 8월 23일에 창립한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이하, YWCA)였다. YWCA는 창립한 지 3, 4년 만에 30여 개의 지부를 거느린 전국적 여성운동 단체로 성장했다. 1924년에는 정종명 등이 사회주의계 여성운동 단체인 여성동우회를 창립했다. 1925년 1월에는 조선여성동우회에 참여했던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들이 경성여자청년동맹을 결성했다. 다음 달에는 조선여성동우회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인 박원희가 경성여자청년회를 창립했다. 1926년 12월에는 경성여자청년회와 경성여자청년동맹이 합동해 중앙여자청년동맹을 결성했다.

2) 근우회의 창립 과정

1927년 2월 13일 일본 유학을 다녀온 여성들이 모여 미국, 중국 유학을 다녀온 여성들과 함께 유학생 친목회를 결성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유학생 친목회를 개최한 것은 두 달 후인 4월 16일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여성들은 단순한 친목을 넘어 여성의 단결과 지위 향상을 위한 여성운동 단체를 결성하는 데에 합의했다. 그리고 박원희, 최은희, 현덕신 등 13명을 준비위원으로 선출했다.

근우회 발기회 모임ⓒ국사편찬위원회

근우회 발기회 모임ⓒ국사편찬위원회

1927년 4월 26일 경성 중앙유치원에서 근우회 발기총회가 개최되었다. 40명의 발기인은 당대를 대표하는 신여성들이었다. 이들은 크게 사회주의계와 기독교계로 나뉜다. 사회주의계 여성으로는 정종명, 박원희 등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조선여성동우회, 경성여자청년동맹, 중앙여자청년동맹 등 사회주의 여성운동 단체를 이끈 여성운동가였다. 기독교계 여성으로는 YWCA에서 활동하던 김영순 등이 참여했다. 여성 교육계를 이끄는 여성들도 발기인으로 가담했다. 근화여학교의 차미리사, 양현여학교의 신알벳트와 경성 시내 여학교 교사들이 참여했다. 그런데 발기인 대부분은 일본, 미국, 중국에 유학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즉 해외 유학이라는 공통의 경험이 사회주의계와 기독교계의 연대를 가능케 한 토대가 되었다.

발기총회에서는 근우회(槿友會)라는 단체명과 함께 다음과 같은 강령을 확정했다.

– 조선 여자의 공고한 단결을 도모함

– 조선 여자의 지위 향상을 도모함

근우회 강령 및 규약ⓒ독립기념관

근우회 강령 및 규약ⓒ독립기념관

발기총회 이후 근우회 창립준비위원회는 모두 4차례의 회의를 통해 창립대회를 준비하면서 “일어나라! 오너라! 단결하자! 분투하자! 조선 자매들아!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라고 끝을 맺는 「근우회 창립 취지서」를 마련했다.

마침내 1927년 5월 27일 경성 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150여 명의 회원을 포함해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근우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이날 중앙집행위원으로 21명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창립대회 직후인 5월 29일에 열린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각 부서의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들 중 기독교계 여성운동가가 8명, 사회주의계 여성운동가가 10명이었고 지도부인 상무집행위원이 7명 선출되었다.

근우회는 창립대회를 마치고 한 달 후인 6월 17일 경성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200명의 회원과 500여 명의 방청객이 모인 가운데 발기회를 거행했다. 이어 7월 15일에 개최한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우리의 앞길이 여하히 험악할지라도 우리는 일천만 자매의 힘으로써 우리의 역사적 임무를 속행하려 한다. 여성은 벌써 약자가 아니다. 여성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자”라고 끝을 맺는 「근우회 선언」을 마련했다.

3. 근우회의 활동과 운영 변화

1) 근우회의 활동

근우회는 국내외에 69개의 지회를 조직하면서 전국적 조직을 갖춘 여성운동 단체로 자리매김했다. 최초의 지회는 1927년 8월 22일에 창립한 전주지회였다. 1927년에는 6개, 1928년에는 35개, 1929년에는 24개, 1930년에는 4개의 지회를 조직했다. 지역별로는 경남에 12개, 함남과 함북에 각각 10개, 전남에 6개, 경북에 5개 순으로 조직되었다. 그밖에 황해도에 4개, 강원도에 3개, 경성, 경기, 전북, 충남, 평남, 평북에는 각각 2개가 설치되었다. 국외 지회는 일본에 3개, 중국에 4개가 조직되었다. 지회들은 본부와 연계하면서 지역 사정에 기반한 여성운동을 펼쳐나갔다. 주로 야학을 설치하고 부인 강좌를 개설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근우회의 주요 사업 중 하나가 야학 설치였다. 20개가 넘는 지회에서 야학을 운영했다.

「교원이 분로하여 학부형 개별방문」(동아일보 1927년 6월 12일자 기사)ⓒ국사편찬위원회

「교원이 분로하여 학부형 개별방문」(동아일보 1927년 6월 12일자 기사)ⓒ국사편찬위원회

근우회의 주요 활동인 강습과 강연은 세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회원의 교양을 높이기 위한 강습회를 열었다. 본부에서는 1927년 7월 7일부터 21일까지 매일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제1회 부인 강습회를 열었다. 둘째 여성문제를 공론화하는 장으로는 토론회를 활용했다. 본부에서는 1927년 10월 20일에 경성 천도교 본당에서 “조선 여성의 해방의 첩경이 경제 독립이냐 지식 향상이냐”라는 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셋째 지방 여성의 교양을 높이기 위한 순회강연을 실시했다. 본부에서는 1929년 5월 경의선, 경부선, 호남선, 경함선 등 철도 노선별로 나눠 순회강연단을 파견했다.

근우회는 여성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공론화했다. 1927년 6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시작하자 조사위원을 파견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조사단을 파견했고 이에 호응해 나타난 경성 여학생들의 시위를 지원했다. 1929년 7월에는 임산부가 경찰에 체포되는 도중에 낙태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진상 조사에 나섰다. 1930년에는 개벽사가 발행하는 『별건곤』 2월호가 근우회를 중상 모략한 기사를 싣자 이에 반발하며 비매(非買) 동맹의 결성을 추진했다.

한편 근우회는 1929년 5월 기관지인 『근우』를 창간했다. 하지만 창간호에 이은 제2호 원고 모두가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압수되면서 기관지 발간은 중단되었다.

2) 근우회 운영의 변화

『근우』 1권 1호(1929년 5월) 표지ⓒ현담문고

『근우』 1권 1호(1929년 5월) 표지ⓒ현담문고

근우회는 창립 1년 만인 1928년 7월 14일에 경성 천도교 기념관에서 임시 전국대회를 개최했다. 그런데 임시 전국대회가 끝난 직후 사회주의계와 기독교계 여성운동가 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이 임시 전국대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장과 23명의 중앙집행위원이 선출되었다. 7월 23일에는 중앙 상무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주요 보직 대부분을 사회주의자들이 차지했다. 이에 많은 기독교계 여성운동가들이 근우회를 탈퇴했다. 그런데 기독교계 간부의 탈퇴는 사회주의계와의 갈등 때문만이 아니라 기독교계 사회운동의 방향 전환과도 연관이 있었다. 1928년에 YWCA, YMCA, 장로교, 감리교,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등이 연합해 농촌사업협동위원회를 설치했다. YWCA도 홍은경을 위원으로 하는 농촌부를 설치했다.

이처럼 기독교계 여성운동가들이 탈퇴하면서 근우회에서 사회주의계 여성운동가의 주도성이 한층 강화되었다. 하지만 근우회가 사실상 ‘해소’될 때까지 근우회 본부에서 꾸준히 활동한 기독교계 여성운동가들도 있었다. 근우회 평양지회장이었던 조신성은 1928년 임시 전국대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1930년에는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처럼 1928년 임시 전국대회를 계기로 근우회에서 사회주의계와 기독교계의 연대가 약화되었으나 근우회 내에서의 조신성의 입지 강화 등을 통해 연대체로서의 면모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근우회는 1929년 7월 27일에 제2회 전국대회를 열고 다음과 같이 강령을 수정하고 행동강령을 제정하며 결속력을 다졌다.

강령

– 조선 여성의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공고한 단결과 의식적 훈련을 기함

– 조선 여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전적 이익의 옹호를 기함

행동강령

1. 교육의 성적 차별 철폐 및 여자의 보통교육 확장

2. 여성에 대한 봉건적 사회적 법률적 일체 차별 철폐

3. 일체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4. 조혼 폐지 및 결혼 이혼의 자유

5. 인신매매 및 공창 폐지

6. 농민 부인의 경제적 이익의 옹호

7. 부인 노동자의 임금차별 철폐 및 산전 산후 2주간의 휴양과 임금 지불

8. 부인 및 소년공의 위험노동 및 야간작업 폐지

9.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10. 노동자 농민 의료기관 및 탁아소 제정 확립

첫 번째 행동강령에서 알 수 있듯이 근우회를 주도하던 사회주의계도 여성 교육을 통한 계몽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했다. 1930년 12월 18일에 열린 확대집행위원회에서도 농촌 여성의 계몽운동, 즉 문맹퇴치운동에 주력하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이러한 노선에 반발하며 1931년 3월 근우회 신의주지회가 해소론을 제기했다. 해소론이 등장하면서 경성지회를 비롯한 지회 활동이 침체에 빠졌다. 여기에 점차 도를 더하는 경찰의 압박으로 활동이 어려워졌다. 근우회 본부는 해소 논의를 위해 1931년 7월 전국대회 개최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근우회는 소멸의 길을 걸었다.

4. 독자적인 여성운동 단체로서의 근우회

흔히 근우회를 신간회의 ‘자매단체’라고 부른다. 근우회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이와 같은 프레임이 없었다. 해방 이후인 1962년 조선일보가 개최한 퇴직 여기자 방담회(放談會)에서 근우회에서 사회주의계로 활약했던 황신덕이 신간회의 자매기관으로 근우회가 조직되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활동 당사자가 발화한 ‘근우회는 신간회의 자매단체’라는 프레임이 널리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근우회는 단순히 신간회 창립을 좇아 결성된 신간회의 자매단체가 아니라 조선 여성 해방을 목표로 내세운 독자적 여성 운동단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