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딩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알림·소식
보훈소식
이달의 인물
도태철 육군 중위

보훈누리
2025-05-07
3
2025년 5월의 6․25전쟁영웅

도태철 대한민국 육군 중위

(자료제공 : 국가보훈부 제대군인지원과 ☎044-202-5715)

 

 

국가보훈부는 1951년 11월 17일,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에 침투해 성공적으로 정찰 임무를 완수하고 949고지 확보에 크게 기여한 도태철 대한민국 육군 중위를‘2024년 5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ㅇ 도태철 중위(전투당시 계급: 소위)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종합학교 제30기(통신간부후보생 제11기)로 입교하여 1951년 9월 1일 소위로 임관한 뒤 국군 제6사단 제7연대의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ㅇ 당시 국군 제6사단은 중부전선을 담당하던 미 제9군단의 우익 부대(전선 분할시 오른쪽을 담당하는 부대)로서 1951년 10월 강원도 김화군 일대의 교암산과 금성 지역으로 북상 중이었다. 그러나 국군 제6사단의 빠른 진격으로 미 제9군단과 미 제10군단 사이에 간격이 벌어지고 일부 전선이 돌출되면서 적군이 침투할 수 있는 약점이 되었다. 미 제8군 사령부는 전선을 정비하기 위해 ‘개리(Gary)선*’을 새로 설정하고 국군 제6사단에 해당 선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개리선(Gary Line): 6‧25전쟁 당시 중부전선 일대에 설정된 가상 방어선

 

ㅇ 하지만 개리선 확보 작전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해당 지역은 북한강 상류가 굽이쳐 흐르는 도하 곤란지였다. 게다가 중공군은 방어에 유리한 주변의 험준한 산악 지형과 고지들을 차지하고 있어 반격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정전 협정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는 개리선 확보가 매우 절실했다. 특히 핵심 거점인 949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신속하고 정확한 정찰과 공격이 필요했다.

 

ㅇ 1951년 11월 17일 새벽, 도태철 중위는 연대의 도하 지점과 적정을 파악하라는 명령을 받고 소대원 5명과 함께 적진으로 침투했다. 그는 강변에 높이 2미터의 강둑이 길게 형성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소대원 2명을 강변에 잔류시키고 나머지 대원들과 함께 강둑을 넘어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강둑에 설치된 중공군의 기관총 진지를 발견한 도 중위는 해당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고 소대원들에게 “이 보고서를 연대본부에 전달하라.”고 지시한 뒤 더 자세한 정보수집을 위해서 홀로 적진 깊숙이 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ㅇ 연대에 복귀한 소대원들은 적의 정보가 기록된 보고서를 연대본부에 전달했고, 이를 바탕으로 국군은 신속하게 도하작전을 전개하여 949고지 확보에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141명 전사, 포로 생포 13명, 박격포와 기관총 등 다수의 장비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52년 5월 소위에서 중위로의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끝>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보도자료용.pn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521pixel, 세로 746pixel 도태철 대한민국 육군 중위

(1928.2.17.~1951.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