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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보훈누리
2025-02-04
14

신   간   회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나라의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적으로 힘을 합쳐 만든 단체

1. 개요

1927년 2월 15일 창립되어 1931년 5월 16일 해체된 신간회는, 일제 식민지시기 국내에서 결성된 항일 운동 단체 중 최대 규모의 공개된 조직이었다. 4년 3개월을 존속하는 동안, 서울의 본부를 비롯해서 전국에 걸쳐서 지회(支會)를 조직하였다. 지회의 수는 시기에 따라 120~150여 개, 총 회원 수는 2만~4만여 명에 이르렀다. 신간회가 최대 규모의 항일 및 사회운동 단체로 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은, 일제와 타협하지 않은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들과 협동하여 투쟁의 힘을 결집한 데 있었다. 당시 이를 민족협동전선(民族協同戰線)이라 하였고, 신간회는 민족독립을 최고 목표로 삼은 민족협동전선체였다.

2. 신간회 창립의 배경

3․1민족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정치’라는 간판을 내걸고 민족분열 정책을 실시하였다. 한때 민족주의를 자처하였던 일부 인사들은 이에 흡수되어 ‘완전독립’을 포기하고,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민족을 개량(改良)하려는 노선으로 돌아섰다. 1923년 들어 민족주의가 타협과 비타협의 두 갈래 경향으로 나뉜 이유였다.

『동아일보』 1924년 1월 2일자 1면에 게제된 「민족적 경륜」(1)ⓒ국사편찬위원회

『동아일보』 1924년 1월 2일자 1면에 게제된 「민족적 경륜」(1)ⓒ국사편찬위원회

1923년 가을부터 동아일보사와 천도교의 일부 간부들이 주도하여 조선총독부의 지원 아래 연정회(硏政會)라는 단체를 조직하려 했다. 1924년이 되자마자 『동아일보』 지상에 이광수가 집필한 사설 「민족적 경륜」이 무려 5회(1924. 1. 2~6)에 걸쳐 연재된 사실도 이러한 동향의 하나였다. 사설의 핵심인 “조선 내에서 허(許)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는 구절은 자치운동을 뜻하였다. 「민족적 경륜」에 반응이 극도로 좋지 않자, 연정회를 조직하려는 계획은 무산되었다가, 1926년 9월 무렵 다시 등장하였다. 이 움직임도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 전 경성일보사 사장으로 사이토오 총독의 언론통제와 정치담당 참모)와 연결되어 일어났다.

이른바 ‘자치운동’이라고 불렸던 노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현 단계에서는 조선인만의 자력(自力)으로 독립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고 식민지 조선의 자치권(自治權)을 획득하자. 군사․외교 등을 제외하고 조선총독 아래 조선의회를 따로 설치하여 조선의 자치 구역을 확보하자. 이렇게 내정(內政)의 독립부터 달성하여 완전한 독립으로 나아가는 실력을 양성하자.

이 같은 자치운동에 반대하여 완전한 독립(절대 독립)을 추구하는 반(反)자치론․절대독립론을 유지하면서, 노동․농민 운동을 인정하여 사회주의자와도 협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민족주의 세력도 있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자치운동 세력을 ‘타협적 민족주의’ 또는 ‘민족주의 우파’, 반자치․절대독립론을 내세우는 세력을 ‘비(非)타협적 민족주의’ 또는 ‘민족주의 좌파’로 분류한다.

신간회가 창립되는 배경과 계기는 바로 총독부와 연계하여 자치운동이 다시 추진되는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안재홍 등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은 ‘좌익(左翼)’을 자처하면서, 자치운동 세력을 ‘타협적’․‘우경적(右傾的) 세력’이라고 비판하는 동시에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의 조직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1927년 1월 19일 28인의 발기인(발기인의 숫자는 27명 또는 34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명의로, ‘우경 사상’인 자치운동을 배격하는 ‘순(純)민족주의’ 단체로서 신간회의 발기인 대회를 마치고 강령을 발표하였다.

신간회는 원래 명칭을 신한회(新韓會)로 정하였으나, 조선총독부가 ‘한’(韓)자를 트집 잡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자 옛날에는 ‘한’(韓)과 ‘간’(幹)이 같은 뜻으로 쓰였고, 또 마른 나무에서 새 줄기가 나온다는 ‘고목신간’(枯木新幹)이란 말도 있으므로 ‘한’을 줄기 ‘간’으로 고쳤다. 원래 명칭과 ‘신간회’에는 모두 완전하고도 새로운 독립국가 한국을 추구한다는 목표가 담겼다.

『동아일보』 1927년 2월 17일자 2면에 게제된 「신간회 창립대회」 기사ⓒ국사편찬위원회

『동아일보』 1927년 2월 17일자 2면에 게제된 「신간회 창립대회」 기사ⓒ국사편찬위원회

명칭과 마찬가지로 강령도 공개된 최종안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총독부의 검열을 거쳐야만 했다. 자료상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강령은 “1. 조선민족으로서 정치 경제의 구경적(究竟的) 해결을 도모함. 2. 민족적 단결을 공고히 함. 3. 타협주의를 부인함”이었다. 수 차례의 검열 끝에 다음 3개 항이 공표되었다. “1.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2.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3.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두루뭉술한 듯하지만, 최종 강령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였다. 신간회는 전 민족의 단결을 통하여 자치운동을 배격하고 ‘새 줄기’ 즉 ‘새로운 한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경제적 각성’은 식민지 체제 안에서나마 한민족이 자생․자활하는 능력을 키워나감으로써, 궁극적으로 정치와 함께 경제상의 독립까지 달성하겠다는 각오가 담겨 있었다.

신간회 회장에 선출된 이상재(1962년 대통령장)

신간회 회장에 선출된 이상재(1962년 대통령장)

1927년 2월 15일 신간회 창립대회가 경성 시내의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 홀(대강당)에서 개회하였다. 3개의 한글 신문은 창립대회를 생중계하듯이 보도하였다. 회장에는 민족운동의 상징인 78세의 이상재를 선출하였다. 이어 35인의 간사를 선출한 뒤, 2월 17일 오전 4시 30분경에 폐회하였다. 2월 21일에는 총무간사회를 소집하여, 7개 부서에 총무간사를 배정함으로써 중앙조직도 체계를 갖추었다.

신간회가 창립되자, 사회주의자들도 개인 자격으로 신간회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자들이 신간회를 지지하는 근거는, 1926년 말에 제기된 ‘민족단일당’(民族單一黨) 이론에 있었다. 이에 따르면 공개된 대중조직의 형태로 민족 전체의 역량을 집중하여 정치투쟁을 수행하는 하나의 당을 조직해야 한다. 1927년 5월부터 신간회의 지회 설립이 활발하게 일어난 배경에는, ‘민족단일당’론에 근거하여 각 지방의 사회주의자들이 신간회를 지지한 데 있었다. 신간회는 창립된 지 불과 10개월 만인 1927년 12월에 지회 설치 100개 돌파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말 그대로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3. 신간회의 활동과 해체

지회가 활발하게 설립됨에 따라, 신간회의 중앙본부와 지회는 여러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신간회운동의 영역은 크게 ①민중계몽 운동, ②민족․민중의 생활․생존권 수호 운동, ③항일 민족운동으로 나눌 수 있다.

① 주로 지회가 설립될 때, 명망 높은 중앙의 간부를 초청하여 시국 강연을 추진했고, 지회에서도 수시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주제로는 미신을 타파하자, 조혼(早婚)을 금지하자, 담배를 끊고 아편을 추방하자 등이 다루어졌다.

② 조선인 본위의 산업정책을 수립하라,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같은 조선인 착취기관을 폐지하라는 주장은 민족 전체의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였다. 노동 조건과 노동 임금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민족 차별 철폐, 최저임금제 확립, 노동자들의 단결권․파업권 보장 등은 노동운동과 결합한 투쟁 사항들이었다. 지주의 소작인 노동 착취 및 소작권 임의 변동 폐지, 고율 소작료 인하, 수리조합 설치 반대, 수리조합 횡포 타파 등은 농민들의 생존과 관련된 핵심 문제들이었다. 이러한 생존권 수호 투쟁은 지주제를 강화하고 조선인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식민지 정책의 근본이 바뀌지 않는 한 개선될 수 없는 사안들이었다. 노동․농민․사회운동을 지원하는 신간회운동이 본질적으로 반(反)봉건 항일 투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③ 신간회는 조선인을 억압하는 모든 악법의 철폐를 주장하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탄압을 규탄하면서 자유를 요구하였으며, 학생 시위 운동을 3․1민족운동과 같은 전 민족의 항일 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하였다. 노동․농민․학생 운동과 연계한 신간회의 반봉건․항일 투쟁의 사례를 각각 들어본다.

1929년 1월 식민지시기 최대의 노동자 투쟁이었던 원산 부두의 대파업이 일어났다. 원산총파업이라 불리는 투쟁이었다. 총파업이 일어나자 신간회 중앙본부는 원산 지회에 적극 지원을 지시하는 한편, 조선변호사협회 회장 이인(李仁)을 현장에 파견해 노동자들의 권익을 법률로 지원했다. 일제가 인천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하여 원산에 보내려 하자, 인천 지회가 이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간부들이 연행되어 구류 처분을 받았다. 전국 각지의 신간회 지회들은 지회별로 동정금(同情金, 격려금을 말함)을 모금하거나, 원산총파업을 지지하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격려 전보를 보내는 등 원산총파업을 지원하였다. 원산총파업은 노동자들의 사회의식과 민족의식을 크게 높인 노동운동이자 민족운동이었다.

1929년 6월 16일부터 19일 사이에, 일제 경찰이 삼림 보호를 빌미로 함경남도 갑산군 화전민 마을에 방화하고 화전민을 추방한 ‘갑산 화전민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 화전민은 작년 수재로 생계를 잃고 이곳에 들어간 수재민이 대다수였다. 신간회 중앙본부는 현장에 진상 조사 위원을 파견한 뒤, 7월 17일 ‘화전민 충화사건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후 ‘갑산 화전민 사건’ 대책을 발표하고, 실행에 옮겨 일정한 성과를 내었다. 그 결과 일제는 1929년도의 수확을 보장하고 화전민을 백채동(白菜洞)으로 이주하도록 허락하였다. 갑산 화전민의 항쟁은 신간회를 비롯해 각 방면의 조선인들이 광범위하게 연대한 항일운동이었다.

『중외일보』 1930년 1월 17일자 호외에 게제된 광주학생운동 관련 신간회 회원 검거 기사

『중외일보』 1930년 1월 17일자 호외에 게제된 광주학생운동 관련 신간회 회원 검거 기사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광주학생운동이라 불리는 학생 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신간회 중앙본부는 진상 조사를 위해 중앙집행위원장을 비롯해 중요 간부들이 직접 광주로 향했고, 광주경찰서장과 일본인 검사장 등에게 조선인 학생들만을 처벌하는 처사를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일제가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한 보도를 일체 금지시켰으나, 신간회 중앙본부는 시위를 전국으로 확산시킬 목적으로 12월 13일 서울에서 ‘민중대회’를 계획하였다. 또 일제를 규탄하는 결의문을 작성하여 각 지회와 신문사에 발송하였고, 일부는 서울 조선극장에 뿌렸다. 민중대회는 일제 경찰에게 사전에 탐지되어 대회 당일 이른 아침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과 대회 준비자들이 검거되었다. 민중대회는 이렇게 좌절되었으나, 이 소식을 들은 서울 시내 학생들이 궐기하기 시작하여 학생 시위운동이 전국으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신간회 지회를 중심으로 광주학생운동을 전국 학생의 독립운동으로 확산시킨 의의는 한국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한용운의 신간회 해소 반대글 「시간적 협동은 필요」,『삼천리』제12호

한용운의 신간회 해소 반대글 「시간적 협동은 필요」,『삼천리』제12호

1929년은 원산총파업으로 시작하여 광주학생운동으로 저물었고, 학생들의 항일 시위는 1930년 3월까지 지속하였다. 1929년 1월부터 4개월 동안 원산 인구의 3분의 1이 참여한 원산총파업을 계기로 노동운동이 확산되고, 학생독립운동이 지속하자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이들은 1929년 미국에서 발단한 세계 대공황도 혁명을 조성하는 정세로 인식하였다. 민중대회 사건으로 신간회의 중앙 간부들이 구속되고, 새로 들어선 집행부는 강경한 투쟁보다는 온건한 합법 투쟁의 방향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가 초기에 내세운 비타협주의를 포기하고, 식민지 체제 안에서 부분의 개량에 만족하는 개량주의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세계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는 오판에 근거하여, 신간회 지도부가 세계 혁명에 부응할 노동․농민 운동을 지도하지 못한다고 단정하고 신간회의 ‘해소’(解消)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31년 5월 16일 신간회 창립대회 후 처음이자 마지막 전체 대회가 열렸다. 전체대회는 ‘해소’를 주장하는 사람들로 중앙 간부진을 구성한 뒤 ‘해소안(案)’을 제출하였고, 일제 경찰이 찬반 토론조차 금지하자 거수 표결로 ‘해소안’을 가결시켰다. 민족운동을 민족 전체가 아니라 계급(주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사회주의자들의 오판은, 1931년 5월 현재 지회수 141개, 회원 수가 4만여 명에 이르는 조직을 대안도 없이 해체시켜 버렸다.

4. 신간회운동의 의의와 교훈

신간회운동은 4년여의 활동으로 끝났지만, 비타협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하나로 합친 최대의 민족협동전선 조직이었다는 사실은 의의가 매우 크다. 그러나 이념상으로 최종 지향점이 달랐던 두 운동 세력의 결합은 지속하기 어려운 한계도 처음부터 안고 있었다. 신간회 해체는 ‘협동’하려면 이를 뒷받침할 이념․이론 또 지탱할 정치세력이 전제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사회주의자들의 신간회 해체 운동이 한창일 때,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은 우경화한 타협주의의 자치운동 노선과 좌경화한 사회주의자들의 계급주의 노선을 모두 비판하면서 ‘의식적 중간세력’을 자임하였다.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이 ‘의식적 중간세력’으로 결집한 뒤 신간회가 민족협동전선으로 발전한 사실은, 중도 세력이 양극단을 극복하고 민족의 통합을 선도·주도하였음을 보여준 선례였다.

지구상의 마지막 분단국가이지만, 선진국의 대열에 든 대한민국이 양극화한 이념 갈등을 극복하고, 민족통일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신간회의 통합정신이 요구된다. 신간회는 한국근현대사에서 비타협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결합과 분리를 경험한 최초의 사례였다. 신간회운동은 긍정과 부정의 의의를 함께 지니면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과 국격(國格)이 세계화라는 수준으로 진전하기 위해서는, 중도의 가치를 확립하고 실천하는 당면 과제도 일깨운다.